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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렌스키의 굴욕과 우크라이나의 비극

황해회장 2025. 3. 26.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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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 소비자저널=박병환 전문기자]

한때 서방 매체들은 젤렌스키 대통령을 ‘사악한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 우크라이나의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분투하는 영웅적인 지도자로서 처칠에 비유하였다. 그는 화상으로 서방 여러 나라들의 의회에 대해 처절하게 지원을 호소하는 연설을 하였고 나토 및 G7 정상회의와 유엔 무대에도 등장하는 등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부상하였다. 미국 의회 연설 때에도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기세등등해진 그는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 서방을 지키는 선봉장처럼 행세하면서 서방 각국에 대해 마치 ‘맡겨놓은 물건을 내놓으라’는 식으로 지원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미국의 정부가 바뀌면서 상황은 180도 변하였다. 재선에 성공하여 지난 1월 취임한 트럼프 대통령은 젤렌스키 대통령을 ‘부패한 독재자’라 부르고 우크라이나를 배제한 채 러시아와의 협상을 추진하며 전쟁 종식을 밀어붙이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젤렌스키는 미국의 정책 추진에 있어 ‘천덕꾸러기’로 전락하였다. 그 결과 서방에서 덮어주고 애써 외면한 그의 참모습이 새삼 드러나고 있다


젤렌스키는 우크라이나 남부 러시아어권 지역 출신으로 대통령 취임 때까지도 우크라이나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였다. 그를 전국적 스타로 만들었던 코미디극 ‘국민의 종’도 러시아어로 제작된 것이다. 2014년 쿠데타로 친러 정권이 붕괴되고 집권한 반러시아 세력은 러시아어 사용을 전면 금지시켰다. 이에 러시아계가 다수인 돈바스(우크라이나 동부 지역) 지역이 반발하여 우크라이나는 내전 상태에 빠졌는데 젤렌스키는 2019년 대통령 선거에서 내전의 평화적인 해결과 러시아와의 타협, 부패 척결 및 민주주의 강화 등을 공약으로 내세워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당선되었다. 하지만 취임 이후 그는 동부와는 다른 역사를 갖고 이에 따라 친서구적 정체성을 갖는, 서부 중심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세력에 휘둘려 점차 공약에서 멀어졌으며 그의 정부는 급기야 돈바스 반군에 대한 무력 진압에 돌입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러시아는 2021년 가을부터 전쟁 발발 직전 2022년 초까지 국경지대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무력시위를 하며 젤렌스키 정부를 압박하였다. 이때 푸틴은 바이든에게 우크라이나를 나토에 가입시키지 말 것과 동유럽에서 나토의 병력과 전략무기를 철수할 것 등 러시아의 안보 우려 해소를 요구하였으나 미국과 우크라이나는 이를 거부하였다. 작금의 상황에 따른 결과론에서 볼 때 우크라이나의 첫 번째 잘못된 결정이었다.

러시아가 2022년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여 1주일도 안 되어 키예프가 포위되자 3월 하순 튀르키예의 중재로 이스탄불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협상이 이루어져 사태 해결을 위한 협정 초안까지 마련되었는데 4월 초 영국의 존슨 총리가 키예프를 전격 방문하여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무기 지원을 할 테니 전쟁을 계속하라고 압박하였고 이에 젤렌스키는 이스탄불 협정에 대한 서명을 거부하였다. 이것이 두 번째 잘못된 결정이었다. 당시 러 측은 우크라이나 측에 나토 가입 포기 및 외국 군대 주둔 금지, 크림반도 관할권과 돈바스 지역의 지위에 대해 추후 협상 등을 제시하였을 뿐이다. 젤렌스키가 존슨의 요구에 응하지 않고 이스탄불 해결책을 수용하였더라면 전쟁 상태는 거기서 멈추었을 것이고 영토 상실도 최소화할 수 있었다. 미국이나 유럽연합은 속으로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에 대해 유보적이었으면서도 그간 겉으로는 가입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아 왔는데 지금에 와서는 가입은 어렵다는 입장을 분명하게 표하고 있다. 

이번 전쟁에서 러시아 측은 전력에 내재적 한계가 있었는지 아니면 고강도 전면전보다는 지구전 내지 소모전 전략을 구사하였는지 모르겠으나 러시아군의 진군 속도는 예상보다 느렸고 이러한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정부는 가짜뉴스를 퍼뜨려 국제사회의 대부분은 우크라이나가 선전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 가운데 전쟁은 3년을 넘겼고 서방의 전폭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군이 모든 전선에서 우세를 보이며 우크라이나군을 밀어내고 있다. 현재 러시아의 요구는 2022년 3월 이스탄불 협정안에 담긴 내용을 훨씬 초과하는 수준이다. 그간 우크라이나는 막대한 피해를 보았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빚더미에 앉게 되어 전쟁이 끝나더라도 과연 홀로서기를 할 수 있을지 의문시된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미국으로부터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라는 압박을 받고 있는데 이는 사실상 사임 압력이나 다름없다. 특히 러시아는 현재 그가 우크라이나의 합법적인 대통령이 아니므로 협상 상대로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2024년 5월에 임기가 종료되었고 2024년 3월에 선거가 실시되었어야 하나 전시 계엄을 이유로 선거를 실시하지 않고 있어 러시아의 주장은 나름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우크라이나 국내 상황을 보면 우크라이나가 지켜주어야 할 자유민주주의 국가인가 질문이 나온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와의 타협을 주장하는 야당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야당을 불법화하고 심지어 야당 지도자를 구속하기도 하였다. 정부에 비판적인 매체들을 폐간시키고 반정부 언론인들을 탄압하였다. 게다가 젤렌스키를 포함한 정부 지도층 인사들의 부패도 심각하다. 그들의 부패상은 러시아 측이 아니라 서방 매체를 통해 드러났다. 단지 그간 서방 매체들이 그러한 사실을 지속적으로 보도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번에 트럼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 대해 희토류 개발권을 요구하였다고 보도가 나오는데 미국만이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도 무기 지원을 대가로 유사한 요구를 한 것으로 밝혀졌다. 우크라이나의 비옥한 농지의 상당 부분이 이미 서방 자본의 손에 들어갔다고 한다. 조선시대 말 나라가 부패하고 허약하여 외세가 각종 자원 개발권을 차지하였던,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가 떠오른다. 

트럼프가 러시아와의 관계 정상화를 1차 목표로 삼고 있는 만큼 이번 전쟁을 종결짓는 과정에서 젤렌스키의 목소리는 무시될 수밖에 없어 보인다. 트럼프는 우크라이나를 ‘밑 빠진 독’으로 보고 물 붓기를 더 이상 하지 않기로 작정한 것으로 보여 우크라이나의 미래는 암울하기 짝이 없다. 우크라이나는 최소한의 대가를 치르고 피할 수 있었던 전쟁을 피하지 않음으로써 현재 비교가 안 되는 대가를 치러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약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동정할 수 있으나 어리석음에 대해서는 그럴 수만은 없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인구가 4천만이 넘고 한반도의 3.5배나 되는 국토는 대부분 평지이며 특히 흑토지대는 ‘봄에 씨뿌리고 가을에 거두기’만 하면 되는 비옥한 땅이라 유럽의 ‘빵 바구니’로 불린다. 우크라이나는 또한 과거 소련 시절 주민들의 평균 지적 수준이 소련방내에서 가장 높았으며 산업화된 지역이었다. 객관적인 여건만 보면 우크라이나는 잘 사는 나라이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우크라이나는 이번 전쟁 발발 이전에도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이었다. 1991년 독립 이래 권력층의 고질적인 부패, 독립 초기에 불법과 탈법으로 국유재산을 사유화하여 부를 축적한 올리가르히(과두 재벌)들의 발호, 고질적인 지역 간 갈등, 친서방과 친러를 오가는 대외정책 등으로 인해 우크라이나는 발전 모멘텀을 확보하지 못하였다. 이런 와중에 뿌리가 백 년 이상 된 ‘반데라주의자’라고 불리는 강경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세력이 혼란을 가중시켰는데 전쟁의 단초는 그들이 제공하였다고 볼 수 있다. 

우크라이나가 독립 이후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강화하려 한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다만 그런 정책이 국민적 통합을 저해하는 것이어서는 곤란하다. 우크라이나 국민은 우크라이나계 약 78%, 러시아계 17%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우크라이나가 다민족 국가임을 인식하고 국민통합을 훼손하지 않도록 유연하게 우크라이나화를 추진해야 했다. 그런데 강경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러시아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유럽연합에 가입만 하면 우크라이나에 밝은 미래가 열릴 것으로 판단하고 서방을 ‘짝사랑’하였고, 서방은 그런 우크라이나를 이용하여 러시아의 약화라는 전략적 목표를 추구하였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은 강력히 반대하였지만, 유럽연합 가입을 반대한 적은 없으며, 우크라이나가 유럽연합 가입을 못 하고 있었던 것은 유럽연합에서 요구하는 회원국 자격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정부 부문의 높은 부패지수와 인권 보장 수준 등이 문제가 되었다. 

한국 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우크라이나 문제의 역사적 및 국제정치적 맥락에는 무지한 채 강한 나라가 약한 이웃을 침략하였다는 도식으로만 접근해 왔다. 그 결과 우크라이나를 도와야 한다고 주장해 왔는데 거기까지는 괜찮으나 러시아를 지나치게 악마화한 것은 실수였다고 본다. 미국에 새로이 들어선 트럼프 행정부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무력행사에 대해 ‘침략’이라는 표현 사용을 거부하였는데 한국정부와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우리는 모든 나라가 자신의 이익에 따라 행동할 뿐이며, 따라서 한 나라의 대외정책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음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박병환 기자parkbh202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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