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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언 칼럼] 독립운동가 이당 김은호의 삶과 예술_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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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언 칼럼] 독립운동가 이당 김은호의 삶과 예술_3

강남 소비자저널 2025. 1. 17. 0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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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용운과 이당 김은호

 

[강남 소비자저널= 하정언 칼럼니스트]

 

이당 김은호는 3.1 운동 33인과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뤘다.

마지막 어진 화사로서 고종과 함께 한 시간이 가장 많았던 이당은 이미 어진화사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기에 고문과 취조가 더욱 심했다.


▲사진=판결문 ⓒ강남 소비자저널

1919년 1월경에 고종을 왜 만났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말을 잘못 하다간 많은 신하가 죽게 될 수 있기에 함구 할 수 밖에 없었다.

북경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지? 조정구와는 무슨 관계가 있는지? 윌슨 대통령을 누구의 명령으로 그렸는지 ?

태극기를 직접 그렸는지? 등 3.1 독립만세 운동이 결국 고종의 죽음으로 도화선이 되어 전국적으로 퍼졌기에 이당에게 취조와 고문은 말할 수 없이 심했다. 33인 독립운동가들에 비해 나이가 어리고 직업이 화가였던 이당은 고문이 가장 심했다는 종로경찰서의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8번의 기절을 한다.

불에 달군 쇠고챙이의 고문과 불방망이의 매질 등 혹독한 고문을 받는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옆방 독방에는 최남선, 또 그 옆방에는 만해 한용운이 있었으며, 그 앞방에는 손병희의 독방이 있었다.

이당과 신석구 목사는 같은 방을 쓰게 되는데 최남선과는 절친으로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금강산 여행에서 이미 독립선언서를 전달 받았다.

만해 한용운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고문을 받으면서도 시를 썼는데 당시 옆방에 있던 이당 김은호와 대화를 하다가 들켜서 벌을 받게 되고 시가 있다.

 

(여기에서 말한 이웃 방이란 서대문형무소 이웃 방 감방에 옥살이를 하고 있는 김은호와 대화를 나누다 들켜 두 손이 묶여 즉석에서 지은 시 농산의 앵무새 아닐까 생각 한다 )

기와로 완전하면 사는 것이 치욕이요 瓦全生爲恥

옥으로 부서지면 죽음도 아름답다 玉碎死亦佳

천지에 가득 찬 가시나무를 베면 滿天斬荊棘

긴 휘파람에 달빛 더욱 많으리 長嘯月明多

 

이 시를 본 옥중의 모든 사람들이 그 기개에 감동했다고 한다. 당시 서대문 감옥에 같이 있던 김은호(金殷鎬) 화백은 오랜 훗날에도 '천지에 가득 찬 가시나무를 베면, 긴 휘파람에 달빛 더욱 많으리'라는 구절을 기억할 정도였다.

천지에 가득 찬 가시나무를 베어버리려는 의지는 투사의 다짐 바로 그것이 아닐 수 없다.

어느 날 한용운은 이웃방과 이야기를 하다가 간수에게 들켜 두 손을 가볍게 묶이었다.

이에 그는 즉석에서 다음의 시를 읊었다.

 

농산의 앵무새는 말을 곧잘 한다는데 농山鸚鵡能言語

그 새보다 훨씬 못한 이 몸이 부끄럽다. 愧我不及彼鳥多

웅변은 은이요 침묵이 금이라면 雄辯銀與沈默金

그 금으로 자유의 꽃 모두 사리라 此金買盡自由花 83)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라고 했던 한용운이 이 시에서는 자유의 꽃을 사기 위해서는 침묵이라는 금을 모두 다 팔아버리겠다고 항변했다.

그의 옥중 시에는 자유와 독립의 두 개념이 일관하고 있다 옳다.

 김상현 박사 : 동국대학교 대학원 사학박사

이당은 출소 후 한용운이 운영하던 유심사로 이사를 한다.

유심사는 전국 고등학교 대학생 모임단체를 맡아서 운영하던 곳이었는데 필운학당 동문들과 의친왕을 도와서 독립운동 자금을 장만해서 보내기도 한다.

화가였지만 독립운동가들의 중심이 되어 임정과 임정요원 가족들에게 생계비를 보내는 일을 하였다.

주변인물로는 의친왕, 윤치소(윤보선의 부친), 권동진, 오세창 , 이종훈, 최린 , 김규진, 최린과 최남선은 독립운동가 33인이었지만 변절을 한다)

▲사진=심우장에 걸려있었던 이당 김은호의 포대화상 ⓒ강남 소비자저널

심우장의 종횡 담을 남을 남기신 해오 김관호선생은 심우장의 내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현판의 심우장은 오세창의 글씨이고 서제는 이당 김은호의 포대화상 서폭이 걸려있고 (해오 김관오선생은 한 학자로서 평생 한용운을 연구한 학자로서 심우장을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으로 표현하셨다)

오세창은 낙청헌(이당의 최초 조선 미술 학원)의 이름과 심우장의 이름을 지어주신 분이다.

만해 만용운이 입적을 할 때 때까지 이당 선생님 그림을 벽에 두고 보셨다는 건 그만큼 귀하게 생각하신 거겠지요.

해오 김 관오 는 한용운 전집 뿐만 아니라 오늘날 영웅 한용운을 만들어낸 분이라 하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김관오의 제자 김 선식 의원은 진품 명품의 의원으로 한용운의 송수첩을 감정 하므로서 이당 김은호의 독립운동가로서의 입지를 다시 한번 증명하고 있다).

▲사진=송수첩의 맨 앞장 ⓒ강남 소비자저널

 

1939년 심우장에서 열린 독립운동가들의 모임에 이당 김은호와 백범 김구, 면암 최익현, 면우 곽종석, 우당 권동진, 위창 오세창, 송만공, 취산 김구하, 우당 유창환, 우하 민형식, 성재 김태석, 고당 조만식, 일주 김진우, 효당 최범술, 무불, 강석주, 탄허, 동리 김시종 등이 모여 독립의 의지를 다루는 모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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