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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언 칼럼] 독립운동가 이당 김은호의 삶과 예술_2 본문
- 이당 김은호의 고향 인천 미추홀구 학익동
[강남 소비자저널=하정언 칼럼니스트]
1892년 인천 문학산 밑 향교리 현에서 부농인 상산 김씨 2대 독자로 출생하였다.
예로부터백학이 많이 날아오는 문학산이 선산이었으며 . 향교에서 할아버지 때부터 훈장을 하시며 학문과 예절을 배운다.
조부는 김용의, 부친은 김기일, 모친은 의성 김씨이다.
어린 시절 글방에서 한문을 배우며 성장하였는데 이때부터 신당 (神堂)의 탱화를 모사하는 등 그림에 상당한 재주를 보였지만 글을 중시하는 집안에서 화가가 되는 것을 반대하여 자연스레 신학문의 관심을 두게 되었다.
1906년 개화기에 들면서 인천에 새로 생긴 인천 관립 일어학교에 입학하게 되며 그 후 사립 인천 인흥 학교 측량과에 입학을 한다. 당시 모두 인천에 새로 생긴 학교였다. 2년의 단기 과정을 마치고 이듬해에 부친이 사망을 하여 갑자기 집안이 몰락하는 일들이 기게 된다. 이로 인해 어린 이당이 가족을 책임져 야하는 가장이 되었다. 그 떄 부터 시작된 배고픔과 어려운 시절은 서울에 상경하여 궁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계속된다.
▲사진= 이당 17세 인흥학교 측량과 졸업증서 ⓒ강남 소비자저널 |
▲사진= 당시 학우들과 찍은 사진 ⓒ강남 소비자저널 |
무작정 상경한 서울에서의 생활은 말할 수 없이 궁핍하여 닥치는 대로 일을 찾았고 그림 실력을 뽑내거나 여유있게 자신을 돌볼 수 없는 시대를 살았다. 하루 하루 먹을 것을 걱정하고 살아야 했던 때였다. 이발소와 구두방을 전전하며 하루 끼지를 해결하며 겨우 살아갔다.
그러던 어느날 이당 김은호에게 운명의 날들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당시 1912년 나이 21세 되던 해, 다니던 안동교회에서 잠시 일을 하며 생활을 하던 시기 그 실력을 인정받아 영풍 서관에서 고서를 세필로 베끼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어릴 적부터 한문을 익혔던 이당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곳에서 김교성과 장안의 명사 현채의 눈에 띄어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 된다. 그들이 보기에는 행색이 너무나도 형편없이 초라했던 어린 청년이 실력이 너무 대단하다고 보신 것이다.
중추원 참의 였던 김교성은 그 실력을 보고 손수 소개 편지를 써서 당시 백목다리 근처에 있던 서화 미술회의 화과에 편입할 수 있게 해주신것이다. 본적격인 회화수업을 시작할 수 있게 해주셨다. 화가의 입문이 된 계기를 주신 분으로 인생의 은인이었다. 아무래도 당시 이당의 놀라운 세필 실력을 알아보신 거였다. 당대 최고의 화가를 알아보신 김교성 어른의 안목 역시 놀랍다. 배고픔에 앞날이 캄캄했던 이당은 이제 고생은 끝났구나 생각했다. 1912년 서화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어 꿈과 같은 일이 이당에게 펼쳐진다.
당시는 1910년 한일 병합으로 대한제국은 망하고 조선이라는 나라는 없었다. 고종황제의 어명을 받아 어진과 기록화을 그리는 어진화사가 되었다.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파란만장한 이당 김은호의 미술 이야기는 전개된다. 어지럽고 혼란한 세상에 세필실력을 인정받아 서화학교를 들어간지 3주 만에 궁으로 들어가 고종황제를 매일 알현하고 어진을 그리게 된다는 것이 한편의 드라마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화가로서 천재화가 20대 의 필력으로 화려한 미술사들만 이야기 할 수 없는 시대였기에 그 안타까움을 금할수 없다.
이당의 최고 역작 백학도가 탄생한 출생지 인천이 이당의 삶과 예술에 있어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 수 있다.
독립운동과 독립운동 자금 마련 ,수많은 제자들을 무료 교육하시고 구제 사업까지 하였기에 본인는 미술관 하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고향 인천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었다. 1979년 1월11일에 타계를 하였는데 그 몇 달 전 인천으로 집을 사놓고 병쇄가 악화되어 정작 살아보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하였다.
어릴 적 고향의 향수와그리움으로 인천의 향토 미술을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1936년이 이당에 의해 시작된 후소회의 회장이었던 운보 김기창 화백에 의해 1979년 9월에 유작전을 하고 그 이후 자연스레 이당 김은호 기념관이 되었다.
▲사진=1970년대 문학산을 바라보고 있는 이당 ⓒ강남 소비자저널 |
▲사진=이당기념관개관기념유작전 안내 표지 ⓒ강남 소비자저널 |
이당 김은호 선생께서 태어나신 이곳 인천에 그분의 기념관을 개관하기에 이른 것을 그 무엇보다 기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이당 기념관이라 이름한 이 터전에 이분의 작품을 수집하여 흠모하는 문도들의 힘을 모아 개관전을 열게 된 것은 홀연히 타계하신 스승님을 다시 뵙고저 하는 추모의 정이 뭉친 까닭입니다.
1912년 우리나라 현대미술의 여명기에 혜성같이 나타나신 이당 선생님은 칠십년 화력을 통하여 우리 화단에 남기신 업적이 지대합니다.
그 어른의 고매하신 인격과 탁월한 화도에의 가르침심은 일찍이 후소회자라는 지도이념을 받들어 운집한 문도들로 하여금 후소회라는 동문그룹을 만들게 하였고 이들이 정신을 거듭하여 오늘날 화단에서 각기 지도적 소임을 다하고 있으니 선생님이 남기신 위업은 무궁한 예술로 한국 화단에 생명을 불어 넣으신 것이라 하겠습니다.
선생님은 다행이도 옛 고향을 찾으시고 이 터전에 당신의 기념관을 마련하실 뜻을 남기시고 가셨으니 이는 바로 그 위업을 고향 땅에 심고 당신의 얼을 살리어 향토 문화에 이바지하고자 하신 것으로 믿는 바입니다.
이러한 선생님의 정신을 이어받기 위하여 저희들 문도생 일동은 이당 기념관 설립을 서둘러왔는데 생애를 통하여 그 토록 많은 창작을 내 놓으신 선생께서는 손수 소장하신 것이 별로 없으셔서 이번에 각계의 애장가 여러분들의 도움을 얻어 개관전을 열수 있게 되었음을 감사하면서 그 분의 예술을 애호하시는 여러분에게 감상의 기회를 드리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문화인천의 미술계를 위하여 다소의 도움이 된다면 큰 보람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번 개관전을 마치고 곧 이어 후소회원 일동의 소품전시를 열기로 하였는데 이는 개관기념을 위한 회원들의 스승에 대한 마음에서 마련된 것으로 여러분들의 참관에 대하여 많은 편달과 지지를 주시기 바라마지 않습니다.
이 기념관은 앞으로 인천의 미술인을 위한 전시장으로 개장하여 창작발전의 회관으로 제공하고자 하오니 많은 이용과 협조가 있기를 바라면서 이만 줄이는 바입니다.
1979 9.13일
제자 운보 김기창
인천의 상징 백학
어릴 적 문학산 자락에서 백학을 많이 보고 자란 것일까?
소나무와 두루미를 주제로 한 작품이 유독 많으며 1919년 3.1운동 서대문 형무소 복역 후 황실의 평안과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길상적인 의미의 작품 문화재 243호 백학도는 이당 김은호의 대표적 작품이다.
나라가 없는 슬픈 황제의 어진을 그리는 어진 화사는 어린 나이에 그토록 아낌 없는 사랑을 받은 고종의 죽음을 보고 참을 수 없는 슬픔과 억울함에 가장 어리고 유일한 화가라는 직업으로 3. 1운동에 과감하게 참여하여 독립신문을 배포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8번 죽을 지경의 혹독한 고문으로 형을 치루고 병든 몸으로 나라를 다시 살리겠다는 의지와 고종을 그리는 마음으로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의 숭고함에 우리는 다시 한번 많은 생각을 해야 한다. 1920년 당시 28세 창덕궁 벽화 장식에 참여한 다른 작가들도 있지만 3.1 운동으로 1여년을 복역한 화가는 없었으며 또한 어진 화사는 없었다.
1919년 3월 27일 (27세)독립신문 배포 보안법으로 체포, 1920년 2월 25일 가석방 28세 (9월에 아픈 몸으로 혼자 그린 6미터의 대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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