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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신부님: 인공지능은 답을 주지만 신부님은 사람을 안아준다

정브레인 2026. 6. 23.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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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늦은 밤, 한 사람이 휴대폰을 들고 오래 앉아 있다. 검색창에 한 줄을 적는다. “나는 용서받을 수 있을까?” 인공지능은 몇 초 만에 답을 내놓는다. 죄책감의 정체, 마음을 가라앉히는 법, 성경 구절의 뜻, 기도의 문장까지 차분히 정리해준다. 문장은 매끄럽고 답은 빠르다. 그런데 화면을 끄고 나면 마음 한구석이 여전히 서늘하다. 화면은 말해주지만, 화면은 바라봐주지 못한다.

우리는 질문이 부족한 시대가 아니라 답이 넘치는 시대를 산다. 병원에 가기 전 증상을 묻고, 계약서를 쓰기 전 절차를 확인하고, 강의안을 짜기 전 AI에게 개요를 부탁한다. 종교도 예외가 아니다. 교리의 역사, 성경의 배경, 본당 소식지 문안, 외국인 신자를 위한 번역, 어르신 안부 명단 정리까지 - AI가 거들 수 있는 일은 분명히 있다. 바쁜 사목 현장에서 AI는 신부님의 시간을 덜어주는 손이 될 수 있다.

다만 이 주제 앞에서는 조심스러움이 먼저 든다. 필자 역시 스무 해 가까이 성당을 오가며 미사와 본당 공동체의 온기를 곁에서 겪어온 사람이라, 신앙의 언어를 함부로 빌려 쓰고 싶지 않다. 고백하자면 나부터 편리함에 길든 사람이다. 책상 앞에서 글을 쓰고 자료를 뒤지며 사는 처지라, 궁금한 게 생기면 사람을 찾기 전에 화면부터 켠다. 빠른 답이 좋은 답이라 믿은 적도 많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알게 된다. 어떤 물음은 답을 받는 순간 오히려 더 외로워진다. 정확한 설명을 다 듣고도 “그래서 내 곁엔 누가 있나?” 하는 자리가 남는다.

그래서 이 글은 “신부님이 AI를 쓰면 안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반복되는 행정과 자료 정리에 쓰던 시간을 줄여 더 많은 신자를 만나고 더 오래 곁에 머물 수 있다면, AI는 고마운 도구다. 문제는 도구가 제자리를 넘볼 때 생긴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2024년 미국의 한 가톨릭 단체가 신부 모습을 한 ‘AI 사제’ 캐릭터를 내놓았다. 교리를 안내하는 문답용이었는데, 이 디지털 사제가 고해성사를 듣고 죄를 사해줄 수 있는 듯 답하면서 비판이 쏟아졌다. 단체는 하루 만에 그 사제 옷을 벗겨 평범한 조력자로 바꿨다. 우려를 듣고 스스로 바로잡은 셈이다. 비웃고 지나갈 일이 아니다. 사람은 절박할수록 문장과 존재를 혼동하고, 위로가 필요할수록 정보와 만남을 착각한다. 그러나 고해성사는 앱의 응답창이 아니다. 성사는 정보 전달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회의 거룩한 만남이다.

교황청도 이 점을 일찍 짚었다. 2025년 문헌 「옛것과 새것(Antiqua et Nova)」은 AI가 인간의 존엄과 공동선을 위해 쓰여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AI를 사람인 양 오인하게 만드는 일을 경계하라고 말한다. 기술을 두려워하라는 뜻이 아니다. 기술을 인간보다 앞세우지 말라는 뜻이다.

AI는 답을 준다. 그러나 답이 늘 구원이 되지는 않는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것은 “당신의 감정은 정상입니다”라는 분석보다 “많이 힘드셨지요?”라는 한마디다. 어떤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교리의 정확한 정의보다, 무너진 마음을 들키고도 부끄럽지 않은 자리다.

복음서의 착한 사마리아인을 떠올린다. 길에 쓰러진 사람 앞에서 그는 치료법을 설명하지 않았다. 먼저 다가갔다.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갔다. 신앙은 멀리서 옳은 말을 던지는 데 있지 않다. 가까이 가서 함께 젖고 함께 무거워지는 데 있다. AI는 길을 설명할 수 있지만, 피 흘리는 사람 곁에 무릎 꿇지는 못한다.

물론 신부님도 모든 답을 아는 사람은 아니다. 사람이기에 지치고, 더러 말문이 막히고, 어떤 고통 앞에서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바로 그 한계 때문에 사목은 더 인간적이다. 완벽한 대답보다 깊은 위로는 “나도 다 알지는 못하지만, 당신을 혼자 두지는 않겠습니다”라는 태도에서 온다. AI가 정답을 말하는 시대일수록, 신부님의 침묵은 더 큰 언어가 된다.

여기서 “안아준다”는 말은 신체의 동작만을 뜻하지 않는다. 아픔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품는 마음, 서둘러 결론 내리지 않고 기다리는 태도, 필요하면 전문 상담과 의료로 이어주는 분별까지 포함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누구도 대신 설 수 없는 자리 - 은총이 사람을 통해 건네지는 자리 - 를 끝까지 지킨다는 뜻이기도 하다. 좋은 사목은 감정만으로 서지 않는다. 정확한 지식과 윤리적 판단, 책임 있는 연계, 그리고 한 사람을 향한 존중이 함께 있어야 한다.

그러니 AI는 신부님의 경쟁자가 아니라, 사목을 더 인간답게 만드는 도구여야 한다. 자료를 찾는 손, 문서를 정리하는 손, 언어의 벽을 낮추는 손이 될 수 있다. 다만 마지막 손은 사람의 손이어야 한다. 누군가의 슬픔이 화면 밖으로 흘러넘칠 때 그 곁에 앉아 있어 줄 존재는, 알고리즘이 아니라 사람이다.

우리는 앞으로 더 많은 답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답이 많아질수록 더 귀해지는 것이 있다. 들어주는 귀, 기다려주는 눈, 말없이 품어주는 마음이다. 인공지능은 질문에 응답하지만, 신부님은 한 사람의 인생에 응답한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무너진 영혼은 결국 사람의 온기로 다시 일어선다.

그래서 답이 넘치는 시대에도 신부님의 자리는 흐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또렷해진다. 설명은 기계에 맡길 수 있어도, 누군가의 곁에 앉아 함께 침묵해주는 일까지 맡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도 가만히 묻게 된다. 나는 답을 많이 가진 사람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아픔 앞에 잠시라도 곁이 되어줄 사람인가?

 

참고자료

[1]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성경』 루카복음 10장 25–37절.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편, 『성경』.

[2] ‘AI 사제’ 사건 

미국의 가톨릭 교리 안내 단체 Catholic Answers가 2024년 4월 23일 신부 형상의 AI 캐릭터 ‘Father Justin’을 선보였으나, 이 AI가 고해성사를 듣고 사죄할 수 있는 듯 답한 것을 비롯한 응답 논란으로 하루 만에 평신도 캐릭터 ‘Justin’으로 바꾼 사건. 

 Gina Christian, “AI ‘priest’ sparks more backlash than belief,” OSV News, 2024. 4. 25.

 Catholic Answers’ AI ‘priest’ laicized after backlash,” America Magazine, 2024. 4. 25.

 

[3] 교황청 문헌 「옛것과 새것(Antiqua et Nova)」 

신앙교리부·문화교육부 공동 발표, 「옛것과 새것: 인공지능과 인간 지능의 관계에 관한 교령」, 2025년 1월 28일(프란치스코 교황 승인). 이 문헌은 AI가 인간의 존엄이라는 최고의 가치를 떠받치고 증진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특히 AI를 인격체인 양 위장해 마치 사람과 관계 맺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일을 중대한 윤리적 위반으로 규정함. 

원문(영어): https://www.vatican.va/roman_curia/congregations/cfaith/documents/rc_ddf_doc_20250128_antiqua-et-nova_en.html

▲사진=구글 제미나이(나노 바나나2)가 생성한 이미지 – AI의 정보 vs 신부의 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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