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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창업경영포럼 ESM소비자평가단 대상 소비자저널 보도자료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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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 소비자저널=조석제 대표기자]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1
🌿 내가 붙잡고 있는 생각은
정말 진실일까요?
있다, 없다.
옳다, 그르다.
유위다, 무위다.
『해심밀경』은
그 모든 이름과 생각을 넘어
진실을 보라고 말합니다.
잠시 멈추고 함께 들어보세요. 🙏
[경전산책 61]
그때 여리청문(如理請問)보살마하살이 부처님 앞에서 해심심의밀의(解甚深義密意)보살에게 물었다.
“최승자(最勝子)여, 일체 법은 둘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일체 법이 둘이 아니라 할 때, 어떤 것이 일체 법이며, 왜 둘이 없다고 합니까?”
해심심의밀의보살이 여리청문보살에게 대답하였다.
“선남자여, 일체 법에 대략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함이 있는 유위(有爲)요, 둘째는 함이 없는 무위(無爲)입니다. 이 가운데 유위는 유위가 아니고 무위도 아니며, 무위 역시 무위가 아니며 유위도 아닙니다.”
여리청문보살이 다시 해심심의밀의보살에게 물었다.
“최승자여, 왜 유위는 유위가 아니고 무위도 아니며, 무위 또한 무위가 아니고 유위도 아닙니까?”
“선남자여, 유위란 곧 본사(本師)께서 거짓으로 시설(施設)하신 구절입니다. 만일 본사께서 거짓으로 시설하신 구절이라면 이는 변계소집(遍計所執)인 말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일 변계소집인 말로 하신 말씀이라면 이는 끝내 갖가지 변계인 말로 말씀하신 것이어서 실다움을 이루지 못하는 까닭에 유위가 아닙니다.
선남자여, 무위란 것 또한 ‘말’에 떨어집니다. 설사 유위와 무위를 벗어났다 해도 조금이라도 말이 있으면 그 모습 또한 그러합니다. 그렇다고 일 없이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일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모든 성자는 성스러운 지혜와 성스러운 소견으로써 이름과 말을 떠난 까닭에 현전에 등정각(等正覺)을 이루고, 곧 이러한 말을 떠난 법성(法性)에서 남들도 현전에 정각을 이루게 하려고 거짓으로 이름과 생각을 세우고는 유위라 한 것입니다.
선남자여, 무위란 것 역시 본사께서 거짓으로 시설하신 구절입니다. 만일 본사께서 거짓으로 시설하신 구절이라면 이는 변계소집인 말로써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일 변계소집인 말로써 말씀하신 것이라면 이는 끝내 갖가지 변계의 말로 말한 것이어서 진실을 이루지 못하는 까닭에 무위가 아닙니다.
선남자여, 유위란 것 또한 말에 떨어집니다. 설사 무위와 유위를 떠났다 해도 조금이라도 말한 것이 있으면 그 모습 또한 그러합니다. 그렇다고 일없이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무엇이 일인가? 이른바 모든 성자는 성스러운 지혜와 성스러운 소견으로써 이름과 말을 떠난 까닭에 현전에 등정각을 이루고, 곧 이러한 말을 떠난 법성에서 남들도 현전에 등정각을 이루게 하려고 거짓으로 이름과 생각을 세우고는 이를 무위라 한 것입니다.”
대당(大唐) 현장(玄奘) 한역해심밀경(解深密經) 제1권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1]
말로 붙잡을 수 없는 진실
– 유위와 무위는 왜 둘이 아닌가
안녕하세요.
우리는 늘 이것은 있다, 저것은 없다. 이것은 맞다, 저것은 틀리다.
이렇게 나누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구분들은 정말로 진실일까요?
만약 그 모든 판단이 이름과 생각일 뿐이라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붙잡고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은 『해심밀경』 제1권에 나오는 아주 깊고도 중요한 가르침을 통해
이 질문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어느 때, 여리청문보살이 해심심의밀의보살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일체의 모든 법은 둘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일체 법이라고 하며, 왜 둘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까?”
이에 해심심의밀의보살이 차분히 대답하셨습니다.
“선남자여, 일체 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유위(有爲)이고, 다른 하나는 무위(無爲)입니다.”
유위란 인연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는 모든 것,
곧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하는 이 세상의 모든 현상입니다.
무위란 그러한 생멸을 떠난 것, 변하지 않는 진리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유위(有爲)는 유위가 아니며, 무위(無爲)도 아니고,
무위 또한 무위가 아니며 유위도 아닙니다.”
이 말을 들으면 우리는 잠시 멈추게 됩니다.
“도대체 무슨 뜻일까?”
보살은 그 이유를 이렇게 밝혀 줍니다.
“유위와 무위라는 말은 부처님께서 중생을 위해 임시로 세워 놓으신 이름일 뿐입니다.”
즉, 이것은 진실 그 자체가 아니라 진실을 가리키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름을 붙이면 그것이 곧 실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말합니다.
이름은 이름일 뿐, 그 자체가 진실은 아니라고.
유위라는 말도 무위라는 말도 모두 말에 의지해 세워진 것이며,
말로 표현되는 순간 이미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 아니라
생각과 분별이 덧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왜 굳이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경전은 분명히 말합니다.
“헛되이 하신 말씀이 아니다.”
성자들은 이미 이름과 말을 떠난 자리에서 바로 깨달음을 이루었지만,
아직 그 자리에 이르지 못한 중생들을 위해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고자
부득이하게 이름을 세우고 유위라 하고, 무위라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가르침을 만나게 됩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어떤 개념을 붙잡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 개념을 통해 개념을 넘어가도록 이끄는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유위에 머물러도 안 되고, 무위에 머물러도 안 됩니다.
심지어 “둘이 아니다”라는 말에도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 역시 결국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가르침은 우리에게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지금 진실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이름과 생각 속에 머물러 있는가?
우리는 늘 옳고 그름, 좋고 나쁨, 있다 없다
이런 기준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모든 구분은 중생을 돕기 위한 방편일 뿐,
그 자체가 진실은 아니라고.
그래서 이 가르침은 특히 처음 불교를 접하는 분들에게는 혼란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경전마다 말이 다른 것처럼 보이고,
수행법마다 방향이 다른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이 불교를 이해하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경전의 말은 붙잡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이해를 돕기 위해 세워진 길이며,
수행법 또한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진실로 나아가도록 이끄는 방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가르침을 만나더라도
“이것이 옳다” 하고 붙잡기보다,
“이것을 통해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경전을 읽을 때에도,
수행을 할 때에도
말에 머무르지 말고 그 말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바로 이 경전이 우리에게 전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수행이란 무언가를 더 쌓아 가는 일이 아니라,
붙잡고 있던 것을 하나씩 내려놓는 과정입니다.
말을 넘어, 생각을 넘어, 이름을 넘어
그 자리에서 비로소 진실은 드러납니다.
오늘의 경전산책은 여기까지입니다.
이 가르침이 지금 이 순간의 삶 속에서 조용한 길잡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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